한국어 사라진 성수동… “노 코리안, 온리 잉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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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 21:27
20대 여성 A씨는 지난 3일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문을 연 이탈리아 여성 의류 매장을 찾았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 매장은 이탈리아 브랜드지만, 미국(캘리포니아·뉴욕)을 테마로 하는 옷 가게다. 여러 걸그룹 아이돌이 입어 ‘아이돌 덕질 필수템’이라며 입소문을 탔다.
진열된 옷을 구경하던 A씨가 한 직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자 직원은 “노 코리안(No Korean)”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얼마나 대기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How long will it take?”라고 묻자 그제서야 “써티 미닛스(Thirty minutes)”라는 답이 돌아왔다. A씨는 “브랜드 컨샙만 미국인 줄 알았더니, 가게도 미국 컨샙인 줄 몰랐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 강모(17)씨는 “한국인 직원이 부족해서 급하게 중국, 일본 국적의 직원들을 채용했다”며 “중국인 직원이 40명, 일본인 10명 정도로 한국인 직원보다 외국인 직원이 많다”고 했다.
(중략)
최근 들어 일부 매장의 메뉴판에 영어만 적혀 있거나 직원 대다수가 외국인인 경우가 생겨나면서 “성수동이 외국처럼 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본지 기자가 외국인이 자주 찾는 연무장길과 성수이로 일대를 살펴본 결과, 외국어로만 고객을 응대하는 매장이 다수 있었다. 성수동의 한 카페는 메뉴판과 안내문이 전부 영어로 써있었다. ‘커피(COFFEE)’라고 적힌 항목에는 ‘아메리카노(Americano)’, ‘바닐라 빈 라떼(Vanilla Bean Latte)’, ‘피넛 크림 라떼(Peanut cream Latte)’ 등 메뉴가 모두 영어로 돼 있었다. 원두 종류도 ‘로스티드 월넛(Roasted Walnut)’처럼 전부 영어로 적혀 있었다.
계좌 이체를 위한 계좌번호마저도 ‘신한뱅크(SHINHAN BANK)’다. 해당 카페를 자주 찾는다는 직장인 박영민(58)씨는 “나처럼 나이 들고 영어가 익숙지 않은 사람은 이 카페만 오면 퀴즈쇼에 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이윤정(47)씨도 “영어도 영어인데, 글씨체 모양이 특이해 무슨 메뉴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 인도 음식점은 주문마저 영어가 필수다. 사장과 종업원 모두 현지 인도인이라 한국어가 안 된다. 고객들은 “영어로만 주문해야 해 불편하다” “현지 감성을 느낄 수 있지만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어려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말에 성수동을 자주 찾는다는 직장인 윤지현(26)씨는 “요새 성수동 음식점은 블로그에 들어가서 추천 메뉴를 봐야 주문이 가능할 정도”라며 “안내판으로는 도무지 무슨 음식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젊은 소비자들이 자주 접하는 한국어보다 영어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측면이 있어 성수동이 이렇게 변화했을 수 있다”며 “여기에 이런 소비자층을 흡수하는 게 매출 증가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상인들이 매장 컨셉을 ‘이국(異國)’으로 잡은 것”이라고 했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에 따르면 ‘광고물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 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한다.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하지만 성수동 일대에는 한국어 설명 없이 ‘피자 바(PIZZA ’BAR)’, ‘타코 게라지(TACO GARAGE)’처럼 영어로만 이루어진 영어 간판이 다수였다.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불어 등으로 적힌 간판도 있었는데, 한 20대 여성 무리는 영어와 불어가 뒤섞인 한 상점 간판을 보더니 “향수? 디퓨저?”라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성동구 관계자는 “평균 주 1회 현장을 확인하며 한글 표기를 비롯한 규정 위반 광고물에 대해 계도, 시정명령 및 이행 강제금 부과 행정조치를 하고 있다”면서도 “벽면 이용 간판 중 4층 미만에 설치하는 표시 면적이 5㎡ 미만인 간판은 허가 및 신고 배제 대상으로 행정처분이 불가한 예외 규정 등으로 인하여 법적 규제 등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삼열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이 영어 간판으로 접근이 불편하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이는 간판을 이해하는 사람만 받겠다는 문화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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